[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23 : 물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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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막히는 타이밍이었다. 스팍이 엔터프라이즈에서의 근무에 지원서를 제출해왔고, 곧장 승인을 보내자마자 사령부에서 새 소식을 받았다. 엔터프라이즈가 정비를 마치고, 출항 날짜가 잡혔다. 이로써 짐에게도 할 일이 많아졌다. 대원들에게 공고를 보내고, 수송 예약을 잡고… 또 스카티를 설득할 필요도 있었다. 우리 배는 괜찮으니까, 수리 상태가 마음에 안 들더라도 고치면 그뿐이라고. 언제나 그렇듯이 말이다. 지원서의 승인이 수리되어 스팍이 과학 장교로 임명되었다는 공식적인 알림이 빠르게 되돌아왔고, 짐은 기쁜 마음으로 술루에게 메시지를 보내 바람대로 수석 조타수로서 근무할 수 있다고 알렸다. 지휘부 일을 조정하기 위해 몇 가지 더 신경써야 할 부분이 있었지만, 짐은 스타플릿과 긍정적으로 합의를 끝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스타플릿의 일을 처리하고 엄마를 도와 집 안팎으로 정리를 하는 동안 시간이 어찌나 빠르게 흘러가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러다 보니 눈 깜짝 할 사이 달이 바뀌고, 어느새 패러것B호의 출정식이 열리는 제7우주기지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는 전 일등항해사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행운을 빌어주기 위해 기쁘게 셔틀에 몸을 실었다. 물론, 그곳에서 만나길 기대하는 사람이 넘버원 뿐만은 아니었다…

스팍은 그의 일정에 대해 알고 있었다. 처음에 조금 데면데면하게 뜸을 들이던 것이 사라지고 나서 둘은 정기적으로 계속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러니 셔틀에서 내려 바로 앞 격납고 문에서 그의 모습을 발견한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를 샌프란시스코로 떠나보냈을 때 보았던 낡은 배낭을 버리고 튼튼해 보이는 더플백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옷도 처음 보는 것이었는데, 벌칸식인 듯 했다. 뉴 벌칸에서 막 돌아왔으니 별스런 일도 아니려나. 그리고 머리도 다시 짧아져 벌칸 스타일로 돌아갔다. 그것 역시 연락을 줄곧 해왔으니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좀 아쉬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 길고 부스스하게 해놓고 다닐 때가 마음에 들었는데. …나중에 우주로 나가고 난 뒤에 다시 길러보라고 설득할 수도 있겠다.

스팍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 옆의 휠체어에 앉은 인영을 보고, 짐은 미소와 함께 한달음에 그쪽으로 달려갔다. 환하게 웃는 파이크의 손을 짐은 꼭 잡았다.

“뭐하러 여기까지 나오셨어요…? 오랜만에 뵈서 반가워요.”

파이크 역시 손에 힘을 주고 악수를 나눴다. “반갑네. 넘버원도 오려 했었는데 내일 일 때문에 한창 바쁘더군.”

“뻔하죠. 오 년을 같이 우주해서 일하고 나니 넘버원이 얼마나 꼼꼼한 지 알거든요. 어쨌든 여기 오셨으니, 나중에 또 뵐 수 있는 거겠죠?”

“물론이지. 넘버원은 성격답게 일정을 초 단위로 스케줄을 정해뒀어. 저녁 약속까지 말이지. 우리와의 스케줄 뿐만이 아니야. 넘버원에게 아첨하려는 사람이 줄을 섰거든. 하지만 자네는 걱정 말게. 넘버원이 시간을 낼 테니까.”

“넘버원의 완벽한 시간 경영은 여전하군요. 뭐, 알아서 해 주겠죠.”

짐은 빙그레 웃고서 고개를 들었다. 파이크의 옆에 스팍이 빳빳한 자세로 서 있었다. 짐과 파이크가 인사를 나눌 동안, 그는 아직 입도 벙긋하지 않은 채였다. 그가 파이크의 앞에서 살가운 티를 낼 인물이 아님을 짐은 알아도 너무 잘 알았기에, 스팍이 냉담해 보인다거나 어색하다고 느낄 이유는 없었다. 이성은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의 한 달만의 재회인데다가, 떨어졌던 때는 애매하게 뭔가를 시작하려다 만 아쉬운 시점이었다. 파이크가 마중나오지 않았다면 서로 부둥켜안고 물고 빨았을 지도 모르겠다… 음. 적어도 방 안에 둘만 있게 될 때까지는 참았으려나. 짐은 그를 향해 웃었다.

“이쪽도, 새로 임명된 내 과학 장교를 보니 반갑네. 뉴 벌칸은 어때?”

“퍽 평온한 정경이었어. 기회가 있을 때 벌칸 문화의 이러한 면을 충분히 누리고 오려고 했지. 엔터프라이즈에 올라 당신의 밑에서 수행하기로 했으니 이제 앞으로 5년간 이와 같은 평온함을 즐길 기회가 언제 올 지 예상할 수 없으니까.”

“그 말이 맞을 지도 모르지.”

헤죽 웃으며 순순히 인정하는 짐이었다. 농담 섞인 스팍의 말투를 이제는 금방 집어낼 수 있었다. 장난기어린 스팍의 한 마디로도, 짐의 안에서 달콤한 감정이 마구 들쑥날쑥 난리를 쳤다.

“하지만 걱정 붙들어 매. 평온한 건 몰라도 분명 흥미로울 테니까.”

“그거라면 의심할 여지가 없지.”

그 둘을 가만히 보고 있던 파이크는 이내 우스운 기색으로 숨죽여 중얼거리더니, 손짓과 함께 먼저 중앙 구획 쪽으로 향했다.

“우주선에서 산다는 건 늘 흥미로운 구석이 있는 법이야. 실제로 우주선에 타고 있는 사람에게도, 그렇지 않은 사람의 눈에도. 그리고 스팍, 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네.”

그는 휠체어를 끌려고 뒤로 다가온 스팍을 돌아다보았다.

“혼자 움직일 깜냥이 안 됐으면 의사들이 시키는 대로 전동 의자를 탔겠지. 됐으니 그냥 두게.”

“알겠습니다, 제독님.”

스팍은 조용하게 다시 옆으로 보조를 맞춰 걸었다. 파이크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흥미로운 구석이니 예상이니 하는 주제가 나와서 말인데. 이 친구, 자네가 어떻게 마음을 돌렸기에 스타플릿으로 복귀했는지 시원하게 얘기를 않더군. 기회가 됐으니 직접 물어봐도 되겠나?”

짐은 제독의 머리 너머로 스팍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뗐다.

“왜 그게 제 공일 거라고 생각하세요?”

“직감이라고 해두지.”

파이크는 흥, 손사레를 쳤다.

“내 입장에서 생각해 보게. 쉽게 믿겨졌겠나? 내가 돌아오라고 수 년을 회유했어도 어찌나 단호한지 꿈쩍도 하지 않았어. 그런데 갑자기 자네가 나타나서 데리고 다니더니 정말로 몇 주만에 돌연 마음을 바꿨다고 하질 않나. 자네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것은 자주 봤지만 그래도 역시 참 신묘하단 말이지.”

“협상하는 데 있어 제독님과 저의 접근 방식의 차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짐은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스팍이 죽인다고 달려들겠지.

“사람들은 곤경에 처하면 대화로 해결하려 하죠. 전 막다른 길에 몰리면, 같이 자버리거든요.”

짐의 이런 자기 비하적인 농담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파이크는 그를 너무 잘 알았다.

“입만 산 건 여전하군, 커크.”

다행히, 파이크는 웃느라 옆에서 경악이 스쳐지나고 있는 스팍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스팍은 짐을 향해 눈썹을 추켜올렸고, 짐은 즐겁게 파이크의 말에 대꾸했다.

“해보기 전까진 모르는 거잖아요.”

“그래, 내가 파고들 일은 아니지. 그거면 됐어. 아무래도 좋아. 나는 자네들이 다시 함께 있는 걸 보니 기쁠 따름이야.”

스팍이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저 역시 돌아와서 기쁩니다. …함장님의 부적절한 유머 감각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야. 다음 5년간은 나랑 부대끼며 지내야 하거든.”

짐이 대꾸했고, 옆에서 파이크가 숨죽여 큭큭 웃었다.
재회하기가 무섭게 파이크는 둘을 두고 돌아가야 했다. 공항에서 나오는 길에 사람이 와서 바삐 말을 전해왔다. 패러것 호의 인사 변동 건에 관련해 파이크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짐과 스팍은, 공항 이곳저곳으로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선원과 엔지니어들만 있는 길 위에 둘만 덩그러니 남겨지게 됐다. 아무도 두 사람을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여전히, 스팍은 눈을 제대로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런 채로 걷는 내내 뒷짐을 지고 이런저런 겉도는 이야기를 나눴다. 파이크가 이동할 때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나(이해할 수 있었다. 짐이 그의 입장이라도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이번 출항식에 대해 얘기하는 그의 모습이 엔터프라이즈가 첫 출항을 하던 때와 비교해 어마어마하게 온도의 차이가 있다는 점, 스타플릿이 배출한 여성 최초의 기함 함장과 넘버원이 가져올 영향 등등.

마침내 스팍이 미묘하게나마 화재를 바꾼 건 기지 북측에 위치한 스타플릿 지구 교차로에 멈춰섰을 때였다.

“머물 장소를 배정받았어?”

“응. B동에 잠시 머물기로 했어.” 짐은 건물 중 한곳을 가리켰다. “너는?”

“앞서가는 게 아니었으면 해. 우리 관계가 최근 진보하기도 했으니 그런 맥락에서 당신만 괜찮다면 같은 숙소를 공유했으면 해.”

짐은 빙그레 웃었다.

“내가 바라던 바인걸.”

둘 다 가져온 짐이 많지 않아 방에 들어온 후 대강 가방을 푸니 정리가 금세 끝났다. 그러는 동안에도 줄곧 짐은 이것저것 대화를 이어갔다. 스팍은 물론 벌칸인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둘만 남게 되면 적어도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거나 손을 만진다든가, 하는 뭔가가 있을 줄 알았다. …표정 없는 얼굴로 멀거니 서있는 거 말고, 무언가는 말이다. 한편 짐으로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는 침대에 풀썩 퍼질러져 앓는 소리를 흘렸다.

“얼른 엔터프라이즈로 돌아가고 싶다— 민간 수송기에 타면 좌석에 꼼짝없이 앉아서 다리도 제대로 못 편단 말이지.”

스팍은 서 있는 자리에서 미동도 없었다.

“여정을 즐기는 데 불편함이 있었어?”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익숙하지가 않아서…”

여기서 함선급 우주선과 일반 수송선의 차이점 따위의 자잘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는 않았기에,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이쪽으로 올래?”

몸을 일으켜서 스팍에게 손을 내밀었다. 스팍은 시키는 대로 했다. 표정없이 말끔한 얼굴이었지만, 가까이 와서 짐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고 손끝을 어루만졌다.

“기대 이상인걸.”

짐은 닿은 손에 깍지를 끼고, 스팍의 다른 쪽 손목도 잡아 끌었다.

“네가 흥미를 잃은 건 아닌가 싶어지던 참이었거든.”

“내가 그런 암시를 줬어?”

스팍은 한 발자국 움직여 침대 가장자리까지 더 다가섰다. 표정은 변함없이 건조했지만, 눈빛에서 집중하는 기색이 조금은 느껴졌다.

“파이크 앞이니까 숨기려는 거라면 이해할 수 있어.”

짐은 그를 올려다보고 웃으며 스팍의 오른손을 가져와 입술에 댔다가, 잠시 후 다른쪽 손도 입술로 끌어왔다. 스팍은 그의 앞으로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췄다.

“단둘이만 남을때까지 그런대도 충분히 알겠는데… 이제 우리 둘만 있는데 넌 여전히 쨍해가지고 가만히 있잖아.”

“나 역시 그러고 싶어도,” 스팍은 짐이 가까이 와서 입을 맞추는 동안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 말했다. “현재는 친밀한 애정 표현을 보이기에는 감정상으로 힘든 상태야.”

짐은 헛소리라고 하고 싶었지만, 이내 ‘현재는’ 이라는 스팍의 말이 걸렸다. 그는 벌칸인으로 자랐고 최근에 벌칸 사회에 돌아가 한동안 그들과 지냈기도 했으니, 스팍이 당장은 조금 서먹하게 구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했다. 적어도, 그의 애정표현에 한계가 있다는 것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잘못 된 게 아니라니까 다행이야.”

짐은 속삭이면서 또 그에게 입술을 붙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 번 물었다.

“이주지에서의 일은 전부 잘 된 거지?”

스팍은 잡힌 두 손을 빼내 짐의 얼굴을 감싸왔다.

“다소 예전 습관이 돌아온 것만 제외하면. 잘 되었어.”

약간 머뭇거리는 듯 하던 스팍이 말했다.

“지난 3주간에 걸쳐 우리 사이에 나눈 연락은 충분히 부족함이 없었어. 하지만… 당신의 육체적인 존재를 다시… 느낄 수 있어서… 기뻐.”

“젠장…”

왜 스팍의 저런 딱딱한 말투에 이다지도 몸이 끓는 걸까? 짐은 좀 더 가까이 엉덩이를 움직여서, 스팍의 몸에 다리를 감고 안겨들었다.

“나도 네가 그리웠어.”

 

일정이 있기 전까지 시간은 충분했다. 파이크가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호출했을 때는 이미 옷을 차려입고 준비를 마친 후였다. 게다가 둘 사이의 긴장감이 해소되고 나니, 축하연에 참석해 귀빈들과 사교를 나누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그 날의 주인공은 넘버원이었고, 두 사람은 스타플릿의 새로운 함장에게 축하와 조언을 주는 (어떤 사람은 자질이 의심되는) 다른 장교들과 합류했다. 짐은 스타플릿의 축하연이라는 게 대부분은 들리는 것만큼 고리타분하고 딱딱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참이었다. 뭐, 스타플릿에서 축하연회를 격식을 차려야 하는 주요 행사로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느긋한 분위기에 저녁식사와 와인 몇 잔을 걸치고 나니 기분이 꽤 근사했다. 자리를 파하고 스팍과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짐을 불렀다. 놀랍고 반가운 마음에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 때까지만 해도 별 생각 없었던 짐은, 자신을 부른 사람이 옆에 있는 스팍에게 눈길을 줬을 때서야 아차 싶어졌다.

“…스팍?!”

우후라가 복도 저편에서 서둘러 다가왔다.

“여기에 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어요!”

일순 짐은 그녀가 스팍에게 안겨서 포옹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저런 표정을 한 후 스팍과 키스를 했으니까… 하지만 우후라는 멈칫하더니 생각을 달리했는지, 환하게 웃는 것으로 대신했다.

“복귀한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너무 반갑다!”

스팍이 대답했다. “나는 잘 지내. 고마워. 잘 지냈어?”

“오, 당연히 잘 지내죠. 그리고 당신.”

우후라는 짐짓 비난하는 투로 짐의 가슴을 콕 찔렀다.

“왜 여기 스팍이 온다는 거 안 알려줬어요?”

“어이, 나야말로 네가 여기 오는지 모르고 있었다고.”

짐은 약간 어색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보다는 우후라가 이 연회의 초대권을 따냈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물론 네가 여기 나타난 게 그다지 놀랍지는 않은걸.”

“농담이죠? 내가 넘버원과 친하진 않아도, 이건 역사에 남을 일이라구요. 여성 최초의 기함 함장이라니…”1

“말 그대로 최초일 뿐인데 뭐. 임무 몇 번 하고 나면 네가 그 뒤를 따라서 두 번째가 될 수도 있잖아?”

짐의 너스레에 그녀는 웃어버렸다.

“하여간 말은 잘해. 여튼, 이렇게 두 사람이랑 마주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어디 가서 한 잔 하면서, 같이 얘기라도 할래요?”

“어떻게 할래, 스팍? 2차를 갈까, 아니면 나중으로 미룰래?”

짐은 스팍의 팔에 살짝 손을 얹었다. 미묘하게, 스팍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만. 자신이 결정권을 스팍에게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든, 혹은 어색해서 피하는 쪽이든 스팍이 결정할 일이었다.

스팍에게 어떤 걸 기대했던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스팍은 역시나 스팍 답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녀의 제안에 따르는 편이 좋을 듯 하군.”

“좋아, 그럼 어디로 갈까? 이번에야말로 너한테 한 잔 살 수 있게 해주는 거야?”

우후라는 짐의 추파를 넉살 좋게 받아쳤다.

“그럼 난 당신 걸 사줄 테니 각자 직접 사 마신 셈으로 치죠.”

“나야 좋지.”

짐은 스팍에게 웃으면서 설명해 주었다.

“8년째 주고받는 농담이야. 신경쓰지 마.”2

“그렇군(I see).”

스팍이 정말로 이해했다면 그 편이 오히려 더 놀라울 것 같다.

우후라와 단둘이였다면 가까운 바에서 술을 마셨을 것이다. 하지만 스팍은 술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둘 다 제 7 우주정거장에 와본 적이 없던지라 주변을 둘러보다 결국엔 적당히 야간 식당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즉 맥주는 물 건너가고 그는 우후라에게 탄산음료를, 우후라는 그에게 커피를 사게 됐다는 뜻이다.

한편 스팍의 문제는 무엇을 마실지보다, 어디에 앉을지에 있었다. 짐과 우후라는 자연스레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앉았지만 스팍은 망설였다. 그는 탁자 사이에 서서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분위기가 심하게 어색해지기 전에 자리를 정했다. 그의 결정은 우후라의 옆에 앉는 것이었다. 우후라는 그에게 환하게 웃어주었다. 조금, 기분이 이상하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짐은 기분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데 익숙했다. 우후라 역시 타고난 이야기꾼이기도 했기에, 주문한 음료가 서빙된 후 두 사람은 휴가 동안의 이런저런 신변잡기적 이야기들을 편하게 주고받았다. 스팍은 대화 내내 거의 듣는 입장이었다. 생과일 주스를 마시면서 홀로 생각에 빠진 듯 했는데, 물론 우후라는 스팍을 마냥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함장님이 도무지 입을 다물 줄 모른다고 해서 내가 당신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짐은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난 너희 둘 모두에게 공평하게 말하고 있었던 거라고.”

“말이야 많이 했죠, 일방적으로. 스팍은 한 마디도 안 했으니까요.”

우후라는 스팍에게 시선을 틀었다.

“어쩌다 당신이 스타플릿으로 돌아온 건지 난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저번에 한두달 전 통화했을 때도 돌아온다는 말은 없었잖아요.”

“그땐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 스팍이 대답했다.

“하지만 이미 그 때도 지구에 있었으니, 분명 돌아오려고 생각은 했었다는 거잖아요.”

“…아니야.”

스팍은 심정이 복잡해 보였다. 적어도 짐의 눈에는그렇게 보였다. 그는 잔에서 눈을 들어 우후라를 똑바로 바라봤다.

“니요타… 네게 솔직하지 못했어.”

우후라는 무슨 말이냐는 듯 미간을 좁히고 짐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알 도리가 없는 짐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대게는 스팍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대강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스팍은 직설적인 성격이기도 했지만, 또 비밀을 숨기고자 한다면 충분히 비밀스러워질 수 있었다.

“어떤 부분에서요?” 우후라가 물었다.

“나는 오래 전에 이미 벌칸 이주지에서 떠났어. 잘 지낸다고 말했지만 실은 그곳에 정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다시 지구로 돌아왔어.”

그녀는 이해하지 못한 듯 했다.

“…스팍, 내가 그걸로 당신을 판단하는 것도 아닌데, 왜 얘기하지 않았어요?”

짐은 이미 조금 전부터 어색하게 불편해지고 있었다. 스팍이 우후라와 단둘이 이야기하게 자리를 비워줘야 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스팍이 저렇게 강렬한 기색으로 우후라를 보고 있긴 하지만, 그다지 신경쓸 이유는 없는 거라고 짐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 때 스팍의 손이 움직여 우후라의 손을 쥐었다.

“이미 네 삶에 불편을 야기한 적이 있으니까. 스타플릿에서 나온 후로 내 삶은 대체적으로 몹시 불유쾌했어. 그것을 구태여 얘기해서 네 기분을 상하게 하거나 내가 선택을 번복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면 했어. 내가 지구를 떠난 이후로 넌 다시 행복한 삶을 꾸리게 되었으니까.”

우후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스팍의 손을 마주 쥐었다.

“그렇긴 했지만… 스팍, 당신은 나한테 중요한 사람이예요. 당신은 언제나 내 인생의 중요한 한 부분일 거예요. 우리가 예전같은 사이가 아니라고 해도요. 내게 뭔가 숨기거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돼요, 알겠죠?”

짐은, 자리를 비켜주겠다고 혀끝까지 나오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스팍도 그렇게 여기는 듯 했고.

“니요타, 너 역시 내 삶에 중요한 사람이야. 그렇기에, 널 이미 한 번 슬프게 했으니 더 이상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았어.”

우후라는 살며시 웃었다.

“스팍, 우린 이제 헤어졌잖아요. 이미 지난 일이예요.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죠. 자기 종족의 문화 유산을 재건하러 떠난다는 거보다 더 심한 이별 사유도 세상에 많아요. 이미 떨쳐낸 지 오래니까, 날 이제 당신의 친구 중 하나로 생각해주면 돼요. 알겠죠?”

우후라는 테이블 너머의 짐을 향해 웃었다.

“여기 짐이 우리와 친구인 것처럼요.”

짐은 우후라가 자신을 친구로 생각한다니 기뻤다. 또 한편으로는, 저 말을 하는 우후라는 아무것도 모른단 생각을 하니 좀 재미있기도 했다. 스팍의 한쪽 눈썹이 올라가는 걸 보니 아이러니를 느낀 건 혼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

스팍은 그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우후라의 손을 놓아주었다.

“이것이 내 진실이야. 나는 이미 오래 전에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 없다 판단하여 뉴 벌칸을 떠났어. 지금은 다시 스타플릿에 돌아와 엔터프라이즈에서 수행하기로 결정했어. 그렇게 하는 편이 내 개인적 성장의 기회를 최선으로 제공받는 길이라 생각했고, 또 니요타, 너와 함장님과 같이 귀중한 친구들의 참가치를 깨닫게 되었으니까.”

우후라는 환하게 웃었다. “당신과 친구로 남을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스팍, 얘기해줘서 고마워요.”

“천만에.”

더 말이 없자, 우후라가 운을 띄웠다.

“…그래서, 그게 다예요?”

“연관있는 일은 그게 전부야.”

“그래요…”

짐은 그녀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스팍이 우리에게 돌아왔잖아. 중요한 건 바로 그거지.”

“물론이죠.”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며, 이제는 거의 빈 잔을 들어올렸다.

“우리 우정을 위해 건배할까요?”

“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짐은 우후라의 잔에 커피잔을 부딪혔고, 스팍도 따라하면서 말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가슴에 얹혀있던 얘기를 털어놓고 나니 스팍은 후련해 보였다. 그 후부터는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세 사람은 잔을 비우고도 조금 더 자리에 남은 채로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내일 있을 패러것 호의 출정식에 대한 이야기로, 또 몇 주 뒤의 엔터프라이즈 순서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마침내 작별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우후라는 두 사람에게 가볍게 포옹을 해주었다. 스팍은 그런 친근한 표현을 꺼리지 않는 듯 했고, 또 짐은 거기에 큰 의미를 두지 말자고 결심한 바였다.

그렇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스팍은,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는 중 넌지시 말했다.

“혹시라도 우후라 대위에 대한 내 행동이 불편해진다면, 내게 알려 줘.”

“아냐, 괜찮아.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

물론, 조금 신경은 쓰였다. 하지만 스팍이 그렇게까지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손이 닿는 건 뽀뽀하는 거랑 같다고 전에 말했잖아. 꼭 연애 감정이 섞여야만 하는 건 아니지.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건지 모르겠는데 손키스가 친밀한 행위인 건 벌칸에게 있어 손이 가장 민감한 부분이라 그런 거겠지?”

“맞아. 어떤 부위가 접촉되든 텔레파시의 전달을 용이하게 하지만, 손이 닿는 편이 가장 간단하지.”

리프트가 도착해 문이 열렸다. 짐은 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우후라가 네게 어떤 감정인지 알고 싶었던 거지?”

“지구인들은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곧잘 ‘괜찮다’고 말하곤 하니까. 실제로는 괜찮지 않더라도.”

그렇다면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우후라는?”

“솔직하게 말했어. 나에 대한 애정은 그대로지만, 이전의 관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전혀 없었어.”

스팍은 짐이 숙소 문을 여는 동안 잠시 멈췄다가,들어와서 말을 이었다.

“사실 오히려, 잠깐의 망설임을 통해 우후라가 이미 다른 사람과 연인 관계를 맺고 있거나 적어도 그런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지.”

이건 처음 듣는 정보였다. “정말? 나도 아는 사람이야?”

“누군가가 있다고 확신은 하지만 간단한 접촉만으로는 그 사람의 신원까지는 알지 못할 뿐더러, 알 수 있다 해도 우후라에게는 원하는 적절한 시기에 소식을 알릴 권리가 있어.”

“알았어. 그건 그렇지.”

스팍은 침대 너머로 돌아나가 커튼이 닫힌 창문을 쪽을 바라보다, 짐을 향해 돌아섰다.

“내가 당신의 지도 없이 스타플릿으로 복귀했다 하더라도 우후라 대위와의 관계를 회복할 생각은 없었을 거야. 내 삶에 큰 변환점을 맞으면서 운명도 기존과 관계없이 갈라지는 게 아닐까 싶어. 내가 한 선택이 정말로 운명의 개입 없는 나만의 길인지 의심할 여지 없이, 그저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간다는 증거가 되겠지.”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으면 되는 거였다. 애초에 짐 역시 운명 따위 믿지 않았다. 스팍의 선택은 운명과 상관없는 그의 선택일 따름이다. 스팍은 자신의 선택에 대한 해석에 사뭇 만족한 듯 했다. 스팍과의 관계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알 수 없어도 결국 서로에게 달린 일이고, 또 짐은 그걸 괜한 위험에 몰아넣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여기서 굳이 말을 꺼낼 이유가 없는 거다. 오히려 말을 꺼내지 말아야 할 이유가 많다면 모를까. 비록 입을 다뭄으로써 스팍을 기만하는 것처럼 되고 말더라도, 짐은 정말이지 이 관계를 지키고 싶었다.

…제길.

“어, 스팍… 그게. 그 운명이니 뭐니 하는 거 말인데…”

“왜?”

“그 부분에 대해 살짝 뭔가 다른 점이 있어서…”

마음같아서는 정말 스팍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구태여 긁어 부스럼을 만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 넌 행복하지?”

스팍의 눈이 희미하게 좁혀졌다.

“당신의 갑작스런 발언으로 인해 지금 이 시점에서 행복하다기보다 의문이 드는군.”

“오케이. 그건 그렇네.”

짐은 벗다 말고 어깨에 걸려 있던 외투를 마저 벗어 의자 등받이에 던져놓고, 스팍을 향해 섰다.

“그러니까… 행복하다면, 모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짐, 나를 알고 있잖아. 진실을 아는 것과 모르고 지나가는 편 사이에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특히 중요한 문제에 대한 나의 관점이 바뀌게 될 수도 있는 진실이라면, 나는 분명 모른 채로 안온하기보다 진실을 아는 편을 택할 거야.”

그렇게 말하는 스팍은 이미 긴장해 있었다. 벌칸 식으로 긴장해 보였다. 앞으로 다가올 충격에 버티려는 듯이 얼굴이 굳어 있었다. 이런 건… 물론, 그렇다고 표정의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애초에 스팍의 표정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방금 전의 만족해 보였던 표정과는 확실히 달랐다. 정말이지 스팍에게 이런 힘든 일은 떠밀고 싶지 않았다.

“있잖아. 그냥 못 들은 셈 치자. 우리 둘이 이대로도 행복하고, 안다고 해서 크게 뭔가 달라질 것도 없는 것 같아.”

“짐.”

그 한 마디 뿐이었다. 보통의 말투에 아주 약간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렸을 뿐인데, 엄하기 짝이없게 들렸다.

어쩔 수 없었다. 짐은 진심으로 스팍이 이 사실을 안다고 뭔가 크게 달라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스팍의 의견이 다르다면, 설득할 수 있을 거다.

“음, 네가 아버지에게 연락해서 스타플릿으로 돌아간다고 전한 다음에 말이야. 너희 아버지가, 어, 그러니까 그 스팍 대사에게 소식을 알렸어. 그리고 그 사람이 내게 전화해서 좋은 결과라고 지지해 줬거든.”

“예상하고 있었어. 내 결정에 대한 그의 지지나 반대 모두 나와는 상관없을 뿐이지만.”

“그래. 좋은 태도야. 그게… 그 얘길 하면서 그 사람이 알려준 게 있는데… 그와 그의 짐 커크는 깊은 관계였대. 육체적으로도, 어…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 감정적 부분보다 육체적인 얘기를 더 부끄러워 할 텐데, 짐 커크는 반대인 모양이다.

“일생동안, 함께 지냈다고 그러더라고.”

스팍은 그 자리에 선 채로 굳어버렸다.

“…분명 그가 특별히 우후라 대위라고 언급한 적은 없었지.”

스팍답게 이해가 빨랐다. 짐은 얼른 말을 이어붙였다.

“우후라와는 그냥 좋은 친구 사이였대. 그치만 봐, 그렇다고 해서 네가 예정된 길대로 따라왔다는 뜻은 아니잖아? 넌 이미 스팍 대사가 하지 않았던 일들을 많이 이뤘어. 반대로 네가 절대 하지 않을 일들을 그 사람이 많이 겪었기도 했고. …거기에 나만 살짝 예외가 된 거 뿐이야.”

스팍은 말이 없었다. 그는 짐이 아닌 어딘가의 허공을 응시한 채 초점을 흐렸다. 입을 꾹 다문 채 한쪽 눈썹을 살짝 실룩이거나, 눈동자가 잠깐 옆으로 향하기도 했다. 열심히 생각중인 거였다. 짐은 끼어들지 않고 기다렸다.

마침내 스팍이 입을 열었다.

“과학적 근거에 따르면, 실험의 결과는 동일한 귀착점이 반복될 경우에만 확증될 수 있어.” 그러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결과를 알았으니, 이번엔 약간의 변화 요인이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결과를 상정할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군.”3

짐은 만면에 놀란 표정을 한 채 스팍을 빤히 쳐다봤다. 스팍이 이 관계를 더 원한다는 사실에 놀란 게 아니라…

“그거, 핑계잖아.”

“나는 앞선 실험 결과의 타당성과 이에 따른 적절한 방법론에 대해 완벽하게 논리적인 고찰을 하고 있을 따름이야.”

스팍은 그러면서, 한쪽 눈썹을 슥 들었다.

“그거 완전 핑계인 거잖아.”

짐은 늘어지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런 식으로 스팍을 비난하면 안 될 거 같지만, 솔직히 너무 놀랐다. 스팍이 운명 얘기를 듣자마자 두 사람의 사이를 부정한 게 아니라, 도리어 자유 의지를 증명하고자 안간힘을 썼다는 것이.

스팍은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나는 평생 내 인간적 욕구를 억제하면서 살아왔어. 그러면서도 5년 전 내 부모님이 선택한 길을 따라보고자 어머니가 물려주신 인간성을 통해 결정을 내렸지. 운명이란 것에 있어 그것을 반증하려는 내 시도는 결실을 보지 못했을 뿐더러… 성가시기까지 했지. 어쩌면 내 삶과 스팍 대사의 삶 사이의 유사성에 일일히 저항할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르겠어. 내 개인적 목표에 부합되는 측면은 포용하는 것도 괜찮겠지. 당신과의 관계를 추구하는 게 비논리적이었을지는 몰라도.”

짐은 들을 수록 한껏 달아오르는 기분으로 헤죽 웃었다.

“무슨 뜻이야, ‘비논리적’이라니? 우리 둘 사이에 뭐가 그렇게 이상한데?”

“당초에는 당신과의 관계가 서로에게 좋다고 판단하여 장기적으로 바라보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는 뜻이야.”

“흠, 맞아. 듣고 보니 그렇긴 했지.”

“난 벌칸으로서 자라난 데 반해 당신의 관심사는 지구인들에 으레 그러하듯 새롭고 흥미로운 것을 경험하는 데에 있어. 또 감정적 부분에 있어 우리 모두 소극적이 된다는 점에서, 난 우리 관계가 장기적 달성을 이룰 확률이 극히 낮다고 생각했어.”

기분이 조금 상할 만도 했지만 짐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스팍이 말을 이었다.

“그렇더라도 탐색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무엇보다, 새로 알게 된 이 사실로 인해 우리가 이어져 있을 확률은 내 원래 계산보다 훨씬 높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래…”

짐은 그 사실을 듣고 당혹해서 걱정하느라 바빴을 뿐이었는데, 스팍과 같은 각도에서 생각하니 또 색달랐다.

“마음에 걸려?”

스팍의 물음에 짐은 고개를 저었다.

“그 반대야.”

스팍 대사와 처음 만났던 그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스팍 대사는 처음 본 그에게, 엔터프라이즈의 함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나자, 놀랍게도 그것을 원하는 마음이 이미 자신의 내부에 가득해 있었음을 깨달았다.

짐은 외투를 걸쳐놓은 의자로 가 앉았다.

“하지만 알고 있지? 정해진 운명같은 건 없어. 확률상 가능하다고 해서 당연한 건 아냐. 우리가 가만히 앉아있는데 자동적으로 그렇게 된 건 아니잖아. 어차피 쉽게 올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아.”

“쉬웠다면 도리어 이상했겠지.”

“맞아.”

여러가지 이유에서 말이다. 무언가를 어렵게 얻을 수록, 적어도 짐에게 있어서 정당한 대가라는 확신을 주었다. 그러니 앞으로 스팍과 어떤 문제에 당면하더라도 헤쳐나갈 수 있는 동기가 되어줄 거다.

둘은 한동안 각자의 생각에 빠져 조용했다. 스팍은 조용히 짐의 앞으로 다가섰다.

“내게 이 얘기를 알려주지 않아도 됐어.”

“맞아…”

짐은 곧 생각을 고쳐 고개를 저었다.

“으음, 아냐. 얘기해야 하는 거였어.”

“그렇지 않아.”

“정말이야.”

짐은 몸을 곧게 펴고 스팍을 올려다보았다.

“들어봐, 스팍… 살면서 지금껏, 나는 책임감 있는 파트너 노릇 같은 걸 해본 적이 없어. 하지만 그저 하룻밤 놀 상대라도 그 순간만큼은 다른 생각 하지 않았어. 서로만 보고 서로에게 솔직했어. 그게 나였어. 그러니까 하룻밤 상대에게 진솔하게 대했다면, 네게는 그 이상으로 해야 해.”

스팍에게 진심을 다하고 싶었다.

“네게 언제나 정직하고 싶어.”

“우리의 관계가 더 복잡하게 변한다고 하더라도?”

“그래. 그렇더라도. 그리고 방금 네가 너무 쉬우면 그것도 이상하다고 하지 않았어?”

스팍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그에게로 한 손을 내밀었다.

“내게 솔직해줘서 고마워.”

그는 낮게 속삭이며 잡은 짐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내가 원해서 하는 거야.”

짐은 스팍의 손가락 사이로 손을 엮었다. 몇 번 하다 보니 이 동작이 보통의 키스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짐이 좋아하는 새롭고 이색적인 거라서 그런 걸까. 혹은 너무 낯간지러워지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애정표현이라 그럴 수도 있겠고… 아니면 단순하게 ‘스팍이니까’ 그렇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스팍과의 사이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이 전에 경험한 적 없던 전혀 새로운 유형의 것들이었다. 벌칸식 키스처럼, 여태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경험들이 그를 채우고 있었다. 짐은 마음에 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잡은 채 한참이고 그렇게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하품이 나와서 짐은 떨어져 나와 몸을 쭉 폈다. 그는 셔츠를 풀어해치기 시작했다.

“자자. 내일은 중요한 날이니까 미리 쉬어둬야지.”

“피곤해?”

코트를 벗으며 스팍이 물었다. 짐은 일어나서 외투 위에 셔츠를 걸쳐놓고 여행가방을 열었다.

“응. 졸려 죽겠다. 아까 마신 커피도 카페인이 안 들어간 거라서. 왜, 따로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함께 체스를 둘 기회가 있을지도 몰라서 준비했어.”

짐은 역시나 늘 진지한 스팍의 표정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아냐. 오늘은 너무 피곤해. 너도 쉽게 이기면 재미없잖아. 앞으로 체스 둘 기회는 많으니 걱정 마.”

“물론 그러하겠지. 5년 임무를 앞두고 있으니.”

“그리고 어쩌면 그 후로도.”

짐은 오늘 원래 스팍에게 하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운명이니 앞으로의 삶이니 하는 대화의 무게에 비해 시시한 내용이라 잠시 잊고 있었다.

“…엄마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집을 남겨두려고.”

스팍이 옷장에 코트를 걸어넣다 고개를 돌려 묻는 눈을 했다.

“감정적 불편을 떨쳐냈어?”

“전부는 아니지만. 그 집에 나쁜 기억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과거를 기억할 수 있는 연결점이 남아있다는 게 좋은 거 아닐까 싶어졌어. 비록 내 고향집이라는 의미 정도 뿐이긴 해도.”

그것을 일깨워준 사람은 스팍이었다. 벌칸 사회가 스팍에게 결코 좋게 다가오지 못했음에도 행성이 붕괴된 일이 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짐은 전부 보았고, 고향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그는 잠옷 바지를 꿰어 입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말야. 네가 아이오와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아서. 네가 같이 있으니까 그곳도 썩 나쁘지 않은 곳이었어.”

“아이오와는 지구에서 가보았던 여타 다른 지역과 비교해서 특별히 흥미로운 곳은 아니야. 그럼에도, 도시에서 볼 수 없는 평온한 정경이고 그 곳에 있는 동안 나 자신의 선택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지.”

스팍은 잠옷을 입다 말을 멈추고 뜸을 들였다. 약간 멋쩍은 듯 보였다.

“솔직히 당신이 말한 것처럼 감상적인 이유가 가장 큰 듯 해. 리버사이드가 마음에 든 건, 당신의 존재가 있어서였어.”

“그럼 임무가 끝나고 다시 같이 내려가는 거지?”

“5년 동안에는 많은 것이 바뀔 수 있어.”

침대에 자리잡은 짐을 향해 스팍이 말했다.

“우리가 그 때까지 서로를 지탱해 현재와 같이 강한 유대를 유지할 수 있다면…”

짐은 그 다음에 분석이나 수치 따위가 나오리라고 생각했다. 스팍의 다음 말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스팍은 곧은 눈길로 짐을 마주해왔다.

“…당신이 가려는 곳이라면 어디든 함께 가겠어.”

짐의 얼굴에 조금씩 놀라운 미소가 퍼졌다. 지금은 그의 애정에 감격하고 곱씹을 타이밍이지만, 여기서 아무 말 안 하고 지나가면 짐 커크가 아니었다.

“그거 잘 됐네. 줄창 아이오와에만 있을 생각은 아니거든. 아직 못 가본 곳이 많아.”

침대 한 편에 이불을 걷고 들어오는 스팍을 보고 있으니 짐 커크의 장난스러운 기질이 나오고 말았다.

“예를 들어 남극이라든지.”

한 쪽 눈썹을 추켜올린 스팍이 눈을 반짝였다. …아무래도 말을 잘못 고른 것 같았다.

“농담이거든, 스팍. 남극에 안 갈 거야.”

스팍은 못 들은 척이었다.

“호기심이 이는 제안이야. 당신의 행성에서만 발생하는 특이한 생태계를 관찰할 좋은 기회가 되겠지.”

“남극에 안 갈거라니까.”

짐은 살짝 철렁해진 심장으로 괜히 키득였다. 스팍도 장난으로 일부러 저러는 거겠지? 그래야 하는데.

하지만 스팍과 같이 이불을 덮고 누워서 다시 생각해보니… 스팍이 이렇게 곁에서 따뜻하게만 해준다면 남극도 그다지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스팍이 얼마나 따뜻한지는, 5년동안 느긋히 알면 될 일이다. 운이 좋다면, 앞으로도 더.

 

 

24, 에필로그 (完) →


  1. 당연하지만 트렉 세계관에는 이미 First Contact 이전부터 여성 함장이 있다. 다만 초기 트렉 시리즈 방영 당시(1965년) 사회 통념상 “여성이 함교에 있는 데 익숙하지 않은(실제 대사)” 스타플릿 분위기에서 넘버원은 예외적인 캐릭터였고, 이 픽은 그 넘버원 캐릭터를 기용하면서 설정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스타트렉에서 공식적으로 여성 함장에 대한 언급이 나온 시기는 The Voyage Home(2286)의 1986년도부터다. 
  2. “Running gag.”약 8년 전 짐과 우후라가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말(“한 잔 살까?”). 
  3. “아직 우리 사이가 운명 머시기라고 확증된 것도 아니니까 일단 같이 한 번 살아보고 얘기하자.” 아아 스팍이 너무 좋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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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23 : 물들어

[Spirk] 중력을 거스르다 – Fighting Gravity – 23 : 물들어”에 대한 8개의 생각

  1. 슈카댓글:

    드디어 완결이네요! 끝이자 새로운 시작으로 보이는 마지막이라 참 좋네요..스팍과 커크가 오랜만에 만나서 꽁냥꽁냥 스킨쉽하는거 너무 귀엽고 좋아요ㅠㅠ외전도 궁금해집니다ㅋㅋㅋㅋ

    1. 끝이자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씀이 제가 후기에 적은 이야기와 상동해서 다시 한 번 이번 편을 읽어보게 되네요. 달콤한 여운이 남는 픽이 되었다면 좋겠습니다. 번역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 네뮤네뮤댓글:

    꺄아ㅏㅏㅏㅏㅏ 드디어 완결편이 올라왔네요!!! 스팍커크 넘 달다랃ㄹ달 초 달달달달해서 좋아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잘 봤습니다!!

    1. 제가 정말정말! 좋아하는 달달픽이라 재밌게 보셨다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환영합니다~~

  3. 리온댓글:

    완결을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처음 이 작품 읽을 때의 기분이 생각나고… 그동안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선녀님!!완결 축하드립니다♥ 좋은 작품 읽게 해주셔서 감사하구요. 다음 포스트에 인사드릴까 싶지만 외전은 외전이고, 완결은 여기니까ㅎㅎ 부제를 보자마자 뭔가 확, 하고 느껴지면서 이 픽의 정체성이랄까요? 그걸 딱 한마디로 표현한 것 같았어요. 역시 센스쟁이~~완결답게 부제도 완결성과 포괄성이..!><
    남극하니까 팽귄생각이 나면서 깨알 웃음을 주는 마지막이 흐뭇하네요ㅎㅎ 아, 무엇보다 우후라를 대하는 모습과, 마지막 짐의 고백에 대한 태도에서 느껴지는 성장한 스팍이 마음을 즐겁게해요 😀 서로에게 물들어, 상대의 단점을 포용하고 장점은 배운 모습과 서로에 대한 굳은 확신…아름답습니다ㅠㅠ 외전에다 선녀님 말씀까지 기다리고있다니, 기대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계획하신일 다 이루시길 빕니다!(대문에 있는 목록 첫번째에 줄그인거 보니 제가다 뿌듯했어요><ㅋㅋ) 내년에도 잘 부탁드려요♥

    1. 한 가지 큰 일을 마무리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완결의 마침표를 찍으면서 그간 있었던 일들이 샤샤샥 스쳐지나갔어요. 처음 의도했던 대로 읽어주시는 분들이 달큰한 감정에 빠질 수 있었을까…. 그런 뉘앙스를 잘 번역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구요. 두 주인공이 서로의 마음에 물들어가듯 읽는 사람도 그런 기분으로 물들었으면 했어요. 이번 23편의 제목이 ‘물들어’인 이유도 그렇사와요. 임께서 너무 제 마음을 이심전심 잘 알아주셔서 이 선녀의 달밤은 늘 춤판으로 얼룩지는 것이구요…(뭐래니(
      임께서 변함없이 찾아와 주셔서 기뻤고 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앞으로도 부담 갖지 마시고 종종 들러주신다면 좋겠어요. 좋은 글 준비해놓고 기다리겠사와요. 올해는 더 건강하고 행복하시구요.

  4. kajesuki댓글:

    꺄아아아~~ 이렇게 빨리 완결을 내주시다니!! 증말 감사합니다 ㅠㅠㅠㅠㅠㅠㅠ 지금도 아주 만족스러운 결말인데 맙소사!!! 외전이 있단 말입니까??? 아 작가님 스릉흡니다 ㅠㅠㅠㅠㅠ 품격있는 고퀄리티 번역해주시는 선녀님도 격하게 스릉흡니다 ㅠㅠㅠ 외전에 나올 둘의 꽁냥꽁냥이 너무 기대되어요. 기다리겠습니다 선녀님~~~~~^^****

    1. 빠른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여서 죄책감이 있사와요ㅠㅜ 제가 정말너무 사랑하는 픽이기에 임께서도 푹 빠져서 읽어주셨다면 더 바라는 게 없겠사옵니다. 늘 봐주시고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완결편 나왔으니 봐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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